menú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수난과 하느님께 버림받음을 함께 겪음
Hans Urs von Balthasar
Título original
Adrienne von Speyr (1902-1967)
Obtener
Temas
Ficha técnica
Idioma:
Coreano
Idioma original:
AlemánEditorial:
Saint John PublicationsTraductor:
Yeong Deok LeeAño:
2026Tipo:
Contribución
Fuente:
“Adrienne von Speyr (1902-1967). Die Miterfahrung der Passion und Gottverlassenheit”. Paul Imhof (편집자), Frauen des Glaubens (수록), 267–77. Würzburg: Echter Verlag, 1985.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가장 큰 공헌은 성경에 생소한 단어인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새롭게 평가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녀가 이루어 낸 이 평가는 신비주의 역사 속의 모든 신플라톤주의적 영향을 극복하고 신약성경으로 되돌아간다. 그녀에게는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와 같은) 플라톤적 ‘상승 도식’이 전무하며, 주관적인 신비 상태와 체험을 강조하는 일도 전혀 없다. 오직 마리아의 소박한 ‘예’만이 적합한 태도로 간주되고 있다. 이 ‘예’는 하느님께 온전한 자유를 남겨 드린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어떤 통찰이나 사명을 전하시기에 가장 알맞다고 보시는 상태로 인간을 자유로이 옮겨 놓으실 수 있다. 아드리엔에게는 신비주의 역사에 알려진 거의 모든 현상(환시,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은사[Kardiognosie], 치유의 은사, 동시 현존[Bilokation], 공중 부양, 오상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현상들은 그녀의 세속 삶이나 영적 삶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았다. 중요했던 것은 바오로가 가장 높이 평가한 예언의 은사(1코린 14,1)였다. 이 은사를 받은 이는 “교회를 성장하게 하기”(같은 곳, 4절) 때문이다. 물론 그 외에도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따르는 데까지 이르는 최고의 은사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었고,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의 수난과 하느님께 버림받음을 함께 겪는 일이 있었다. 구약과 신약의 의미에서 예언은 미래를 미리 알리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 관하여 교회와 세상에 말씀하시려는 것을 정확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하고 해석하는 것(요한 1,18)이다.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는 현재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약 쉰 권의 저서에서 이 일을 수행했다. 그 책들은 일부는 성경 각 권의 해석이고, 일부는 마리아, 십자가 위의 말씀, 고해, 미사, 기도, 성사 전반, 교회 내 신분들과 같은 개별 주제들을 다룬다. 그 해석은 매우 깊은 신비를 다루는 곳에서도 언제나 냉철하고 정확하며 간결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 감정은 완전히 뒤로 한다. 말한 분량이 방대하지만 -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고해 사제에게 구술했다 - 해석은 언제나 새롭고 본질적이며 반복이 없다. 특정 주제와 목적이 여러 책에서(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측면에서) 되풀이된다면, 이는 그녀의 신학적 사명,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실천적 사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 사명은 가톨릭 진리 전체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그녀 안에서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일은 그녀 자신이 전달한 것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가 세워야 했던 공동체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 공동체들은 그녀의 시각(視角)을 살아 내고 전해야 했다.
그녀의 생애와 그 은사의 개별 측면들을 살펴보기 전에, 여기서 말하는 그녀의 시각에 대해 먼저 간략히 기술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짧은 정식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녀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친밀한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고, 그의 영신수련을 더없이 집중하여 내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이끌려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적 배경 속으로 들어갔다. 이 배경은 이냐시오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세세히 말로 풀어낼 수 없었던 것이며, 어쩌면 천국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깨달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요한계 문헌으로 이끌렸다. 이 문헌은 초연함, 준비된 자세, 순명에 관한 이냐시오의 시각을 그리스도론적으로(그리고 그로써 삼위일체론적으로) 풍요롭게 하였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요한 6,38) 아드리엔의 초기 저서 가운데 하나는 마리아의 ‘예’를 그 모든 차원에서 다루었다. 주님 탄생 예고 장면에서 처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열리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마리아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곧 성령께서 감싸 주심으로써 성자를 낳을 이로 인사하신다. 순수한 투명함 속에 있는 마리아의 준비된 자세는 사랑과 순명의 일치이다. 아무것도 감추거나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드리엔은 그녀가 아끼던 말인 완전한 ‘고해의 자세’에 관하여 말한다. 또 영혼과 육신, 모든 것을 바치는 마리아의 준비된 자세에 관하여 말한다. 이 자세는 모든 이를 - 심지어 사후에 시성된 이들까지도 - 시험하는 척도로 적용된다(아무개는 하느님의 뜻을 향한 준비된 자세에서 어디까지 함께 나아갔는가?). 이 주제는 고해에 관한 중요한 책에서 그 모든 신학적, 실천적 측면에 걸쳐 폭넓게 전개된다. 1940년대에 구술된 이 책은 고해성사가 위기를 맞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시사하는 바가 많다. 따라서 이냐시오적인 것을 신학 전체로 확장했다는 이 점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그녀의 은사를 간추려 설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녀의 생애에 관하여 몇 마디 하겠다.
생애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1902-1967)는 유라 지방의 도시 라쇼드퐁에서 네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과 의사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랐고, 아버지는 그녀에게 참된 벗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1918년에 제때 발견하지 못한 위 천공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그 일을 미리 예감했었다. 어머니는 출산이 매우 힘들었던 이 아이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다. 어머니의 총애를 받던 언니 헬렌은 동생을 적잖이 괴롭혔다. 그러나 어린 아드리엔은 자신의 천사를 보았다. 천사는 아이에게 맞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었고, 저녁마다 그녀와 함께 양심 성찰을 하였다. 또 작은 판지 조각으로 그녀의 벗(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의 이름을 만드는 법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IL(Ignatius Loyola)이었고, 그 벗이 벗으로 두고 있던 이의 이름은 IJ(Ignatius, Johannes)였다. 여섯 살 때 성탄 대축일에 그녀는 시내의 한 계단에서 초라한 옷차림에 다리를 조금 저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자기와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기꺼이 그러고 싶었지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요, 아저씨. 하지만 즐거운 성탄 되세요!” 나중에 그녀가 작은 공책에 큰 글씨로 “J’aurais dû dire oui”(“‘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라고 적자, 어머니는 그녀를 꾸짖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이렇게 타락하다니!” 훗날 아드리엔은 성 이냐시오를 셀 수 없이 여러 번 보았고, 마리아와 천국의 수많은 성인도 자주 보았다. 그러나 한동안 삶은 고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은 생활비를 아껴야 했고, 아드리엔은 학교에 다니면서 살림 전체를 떠맡아야 했다. 그녀는 중증 결핵에 걸려 레쟁에서 2년 동안 요양하였다. 그곳에서 한번은 가톨릭 성당을 찾았다가 여기가 바로 내 집이라는 체험을 하였다. 이후 오랜 회복기를 거쳤다. 그 가운데 얼마간은 베른 근교의 큰 정신 병원 ‘발다우’의 원장이던 친삼촌 곁에서 보냈다. 삼촌은 흥분한 환자들에게 그녀를 즐겨 보내고는 했는데, 그녀가 나타나면 환자들이 곧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회복한 뒤 그녀는 독일어권인 바젤의 김나지움에 들어가 2년 뒤인 1923년 졸업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녀는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족은 허락하지 않았다. 삼촌도 그 공부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드리엔은 개인 교습으로 학비를 스스로 벌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집에서 내쫓고 그녀의 물건까지 뒤따라 내던졌다. 형제자매는 그녀와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리하여 아드리엔은 이제껏 잠만 자던 다락방에서 낮 시간까지 보내게 되었다. 여기서 덧붙여 둘 것이 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개신교 종교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하느님은 다르시다.” 또 고정관념처럼 그녀를 따라다닌 생각이 있었다. 참된 고해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구세군에서, 옥스퍼드 운동에서 그것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언제나 무언가 한 조각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도를 많이 하였고, 공부하는 동안에도 그러하였다(해부학 실습 때에는 해부할 지체의 주인이었던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또 환자들을 충분히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 몇몇 교수에게 분개하였다. 1927년 7월 그녀는 처음으로 혼자 산베르나르디노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곳에 와 있던 바젤 사람들이 함께 그녀를 설득하고 압박해 바젤의 역사학자 에밀 뒤르와 혼인시키고자 했다. 뒤르는 아내를 여의고 두 아들과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연민은 큰 사랑으로 바뀌었다. 1931년 아드리엔은 바젤에서 개원했다. 그녀는 에밀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에밀은 1934년 전차에서 떨어진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제자이자 훗날 역사학 정교수로서 그의 후임자가 된 베르너 케기를 그녀에게 부탁하였고, 아드리엔은 1936년 그와 혼인하였다. 불안한 종교적 모색은 끊임없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여러 가톨릭 성직자는 이해할 수 없게도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1940년에 나는 그녀를 만났다(나는 막 대학생 사목 담당 사제로 바젤에 부임한 상황이었다). 몇 차례 교리 수업을 하였으나 그 수업은 거의 필요 없었다. 그녀는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당연한 것,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같은 해 모든 성인 대축일에 개종하였다.
개종
개종하자 곧바로 환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마리아와 이냐시오에 관한 환시였고, 곧이어 요한 복음서에 관한 구술도 시작되었다. 밤에 한 대목의 내용이 그녀에게 보여지면, 이튿날 그녀는 그것을 구술했다. 이것은 하루에 반 시간 가량 진행되었고, 나중에 휴가 때에는 더 길어졌다. 때로 우리는 두 권, 아니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작업했다. 구술과 함께 점점 더 혹독하고 가파른 고통의 체험이 뒤따랐다. 그것은 완전히 하느님께 버림받은 상태였으며, 그녀는 이를 ‘구렁 속에 있음’이라고 불렀다. 이 체험은 성토요일에 그 정점을 맞이했는데, 이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성토요일의 신학은 그녀로 인해, 아마도 신학사에서 처음으로, 놀라운 풍부함과 정밀함으로 해마다 더 드러났다. 하지만 수난의 이 마지막 단계가 지닌 신비는 당연히 언제나 온전히 지켜졌다.
이미 1942/43년에 우리가 함께 세워야 할 한 공동체의 첫 윤곽이 드러났다. 이 공동체의 회원들은 세속 직업과 복음적 권고에 따른 삶이 결합된 방식으로 살아야 했다. 아드리엔 자신도 복음적 권고의 삶을 서약했다. 1947년 재속회의 헌장인 「섭리의 어머니이신 교회」(Provida Mater Ecclesia)가 반포되었을 때 우리는 매우 놀랐다. 우리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엔은 여대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고, 곧이어 여성 공동체가 생겨났다. 남성 공동체는 대학생 영신수련에 쏟은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뛰어난 학생들은 수도회에 들어갔고, 가장 재능 있던 학생은 레쟁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의 협력은 수도회 안에서 처음에는 묵인되었으나 나중에는 대부분 금지되었다. 떠맡은 책임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던 아드리엔은 내가 수도회를 떠나리라는 것을 미리 보았다. (나는 얀센스 총장과 두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마지막에 나의 학우 도나시앵 몰라에게서 영신수련을 받으라고 권하였다. 영신수련이 끝날 무렵 몰라는 나의 결정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냐시오를 섬기기 위하여 1950년 예수회를 떠났다. 어떤 주교도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3년 뒤 스위스의 벗들이 쿠어 교구 주교에게 청원하였고, 주교는 재정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를 자기 교구에 받아들였다.)
1953년부터 1967년 아드리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기는 점점 깊어지는 병으로 얼룩져 있었다. 천국과 그곳에 있는 성인들과의 교류는 지상의 삶과 나란히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삶과 같았다. 이 삶은 극심한 버림받음의 체험으로 끊기곤 하였고, 거의 믿기 어려운 고행이 뒤따랐다. 그녀에게 보여진 세상의 죄의 비참함 앞에서 그 고행은 당연히 행해져야 하는 일로 여겨졌다. 또 밤마다 ‘여행’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어딘가로 옮겨졌는데(“텅 빈 성당이에요, 남프랑스인 것 같아요…”), 대개는 고해소의 고해자들이나 망설이는 사제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주어진 은총이 클수록 요구되는 일도 그만큼 폭넓어졌다. 그녀의 책들에 쌓인 신학적 통찰의 보화는, 그녀의 공동체들의 여러 세대뿐 아니라 온 교회가 그것을 양식으로 삼을 만큼 풍성하다. 이미 수많은 번역이 이 저작들에 깃든 풍요로움을 증언하고 있다(몇몇 출판사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저작을 출판 목록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는 피로와 병(심장병, 당뇨 등)으로 구술은 점점 드물어졌다(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드리엔에게서 그녀가 구술한 것의 몇 배를 쉽게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54년에는 병 때문에 그녀가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병원도 닫아야 했다. 수많은 가난한 이가 그녀에게 몰려들었고, 그녀는 종종 의학적 처방보다 윤리적, 아니 ‘사제적’ 조언을 더 많이 해주어야만 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많은 저명인사가 뮌스터 광장의 집을 찾았고 아드리엔과 서신을 교환했다. 몇 사람만 예로 들자면 라인홀트 슈나이더, 알베르 베갱, 로마노 과르디니, 가브리엘 마르셀, 에리히 프지바라, 카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테오도어 호이스, 주르네 추기경, 여러 도미니코회원들(드 메나스 신부 등)과 예수회원들(피에르 간, 후고 라너, 앙리 드 뤼박 등), 그리고 물론 바젤 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이다. 늘 돈이 모자라는 가운데, 너무나 크고 불편하며 중앙난방도 없는 집에서 살림을 꾸려 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자주 바뀌는 고용인들로 인해, 남편이 학문 연구에 방해받지 않도록 살림을 꾸려야 했다. 아드리엔 자신은 지극한 가난 속에 살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말년
해가 갈수록 그녀 주위는 고요해졌다. 점점 시력을 잃어 가면서 그녀가 좋아하던 독서와 자수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기도하였다(나의 모든 활동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뚜렷이 이 기도 안에 감싸여 있었다). 누가 물을 때에만 그녀는 성인들과의 교류에 관하여 얘기했다. 위층에서 잠을 자던 그녀는 거의 일어설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날마다 힘겨운 계단을 내려가겠다고 고집하였다. “성모님께서, 그리고 천사들이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요.” 그녀는 다른 이들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하여 대속적인 고통스러운 죽음을 원하였고, 실제로 그러한 죽음을 맞았다. 그것은 몇 달에 걸친 끔찍하고 굴욕적인 하복부 암이었다. 마지막 날들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나는 어둠 속에서 벽을 따라 더듬어 가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문이 없어요…”). 그러나 그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끊임없이 되뇌며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내면 풍경은 마지막에 오직 골고타뿐이었다. 그녀는 ‘완덕의 단계’나 궁극적인 신플라톤주의적 ‘일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사람은 오직 ‘예’ 안에서만 자랄 수 있다. 곧 성자의 ‘예’와 어머니의 ‘예’, 그리고 삶 속에서 그 ‘예’를 따라 말하려고 애쓰는 모든 이의 ‘예’ 안에서만 자랄 수 있다. 아드리엔의 책 『객관적 신비주의』에서 우리는 신비 체험의 내용이 올바른 것이라면, 신경(Credo)에 요약된 진리들을 깊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 이 진리들은 가장자리에서(그리고 흔히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밝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생생하게 살아나야 한다. 짝을 이루는 저서 『주관적 신비주의』에서는 교회사의 신비 현상들이 그 원상(原象)을 성경의 현상들에서 찾는다. 이것들은 모세, 예언자들, 욥의 현상들이며, 신약에서는 바오로와 요한의 묵시적 환시들이다. 아드리엔은 요한의 환시들을 다시 보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바오로의 탈혼 위에 덧입혀진 전통적인 신플라톤주의적 덧칠(“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2코린 12,4)은 벗겨진다. 물론 보여진 것도 있었는데, 이는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성경과 마찬가지로 ‘어물어물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안에서 유연해진 이것을 전달에 가장 적합한 (심리적) 상태로 옮겨 놓으신다. 그래서 아드리엔은 자주 일종의 탈혼 상태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보여 주었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고해 사제가 누구인지조차 더는 알지 못하였고, 오로지 ‘순수한 전달의 통로’로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전해진 것들은 인격적 관계를 거쳤더라면 변질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성경적 신비주의에서 보면,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예컨대) 극동의 신비주의를 나란히 놓으려는 모든 시도는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언제나 육화적이고, 비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탈육화적이다.
아드리엔의 예언 은사는 그 교회적 풍요로움을 무엇보다 계시를 해석하는 그녀의 저작들에서 드러낸다. 이 저작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그녀의 신비주의가 지닌 더 개인적인 측면들은 보완적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부차적이다. 이 측면들은 본질적인 것이 수용된 후에 대중에게 공개될 것이다. 호기심과 선정적인 것을 좇는 욕구만큼 교회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
참고 문헌
- Albrecht, B., Eine Theologie des Katholischen. Einführung in das Werk Adriennes von Speyr, Bd. 1: Durchblick in Texten, Bd. 2: Darstellung, Einsiedeln 1972/1973
- Balthasar, H.U. von, Erster Blick auf Adrienne von Speyr, Einsiedeln, 31975
- —, Unser Auftrag, Einsiedeln 1984
- Speyr, A. von, Die Beichte, Einsiedeln 21982
- —, Das Wort und die Mystik, Bd. 1: Subjektive Mystik, Bd. 2: Objektive Mystik, Einsiedeln 1980
Otros idiomas
Título
Idioma
Alemán
Español
Francés
Italiano